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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완 (1931.9.13 ~ 2010.7.26) :

수도경비사령관으로 부임한지 갓 2개월이 되었을 때, 12.12 반란이 있어났고, 반란을 진압하고자

전두환과 신군부에 맞서 싸운 진정한 군인이었다.  

 

1931년 경북 칠곡군에서 태어남.

1950년 육군행정종합학교를 11기로 수료하고, 육군 소위로 임관.

1971년 1월 장군으로 승진.

1979년 11월에 수경사사령관(소장)으로 취임. 

1979년 12·12 신군부 쿠데타를 진압하려 했으나, 수경사 예하 연대장들의 배신으로 실패하고, 보안사령부에 체포됨.

1979년 12월 13일부터 1980년 3월초까지 보안사에 갇혀 있다가 풀려났고, 그 후에 가택연금을 당함.

1994년 4월, 자유경선으로 실시된 재향군인회 회장선거에서 당선.

2000년 총선에서는 민주당의 제16대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정계에 진출.

2002년 노무현 대통령 후보 보훈특보와 국회 정무위원회 위원으로 활동.

2004년 제16대 국회의원 임기가 끝난 후 정계에서 은퇴.

2010년 향년 79세에 돌아가심.

 

 

배설(裵說; 배델 Ernest Thomas Bethel) (1972.11.13 ~ 1909.5.1)

영국인이었던 배델(베델)은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를 창간하고, 한국국권수호 언론활동을 펼쳤다.

조선총독부 초대 통감이던 이토 히로부미는

"나 이토의 백 마디 말보다 신문의 일필이 한국인을 감동케 하는 힘이 크다."며 대한매일신문을 두려워했으며,

"대한매일신보의 기사는 조선인을 선동시켜 소요를 일으키거나 공안을 침해할 우려가 있다."면서 

신문 발행인 배델을 고소하기에 이른다.

1907년과 1908년에 벌금형 4000만환, 근신 6개월, 금고3주의 판결을 받았으며, 금고형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배델은 심장병을 얻었고, 37세라는 이른 나이에 생을 마감한다. 
대한매일신보의 필진으로는 민족주의자 양기탁(梁起鐸), 박은식(朴殷植), 신채호(申采浩), 안창호(安昌浩),

장지연(張志淵) 등이 활동했다. 그가 마직막으로 남긴 말은 "내가 죽으나, 대한매일신보는 영생케 하여

한국동포를 구하시오....."였다.

안타깝게도 배델이 사장에서 물러난 이후에 비서였던 영국인 만함은 이장훈에게 신문사를 팔아버렸고,

이장훈은 경술국치 이후에 대한(大韓) 글자를 떼어내고, 매일신보는 일본 총독부 기관지로 전락하게 된다.

 

1872년 11월 13일, 영국 브리스톨에서 2남 2녀의 장남으로 태어남.

고등학교 졸업 후에 아버지를 도우러 일본으로 와서 완구점을 했으나 일본인의 사악함에 분통을 느낌.

1904년 2월 10일, 런던 데일리 뉴스의 통신원으로  한국에 왔다.

1904년 7월 18일, 서울 전동에서 본인과 부인의 사재를 모아서 대한매일신보와 영자신문 창간.

1905년 언론을 통한 민족사상 고취 운동을 통한 전개하니, 이것이 바로 언론을 통한 독립운동이었음.

1908년 6월, 상해에서 3주간 징역을 살면서 재판을 받음. 

1909년 5월 1일, 한국에 돌아온 뒤, 재판 후유증으로 심장병을 앓다가 37세에 돌아가심.

2000년 배델에게는 짐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그의 딸(배델의 손녀)이 40살 되던 해에 한국을 방문함.  

2012년 (현) 한국 독립를 위한 외교 활동을 펼치신, 선교사 헐버트(1863~1949) 박사와 함께 양화진 외인묘지에 잠들어 계심. 

 

 

할보(轄甫; 헐버트 Homer Bezaleel Hulbert) (1863.1.26~1949.8.5)

호머 헐버트는 선교사, 언어학자, 사학자, 교육가이며 삼문출판사 2대 사장, 황성기독교청년회 초대회장을 지냈다 

"나는 웨스트민트터 성당보다도 한국 땅에 묻히고 싶다."는 비문은 헐버트 박사의 한국 사랑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헐버트 박사에게는 1950년에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저서로 '한국사(2권)', 대동기년(大同紀年, 5권)', '한국견문기' 등이 있다.

 

1863년 미국 버몬트주 뉴헤이븐에서 태어남.

1884년 다트머스대학을 졸업한 뒤 유니온신학교에 입학.

1986년 (고종 23년) D.A. 벙커와 함께 육영공원(育英公院)의 외국어 교사로 1891년까지 재직.

1905년 고종의 밀서를 가지고 미국으로 돌아가 국무장관과 대통령을 만나려 하였으나 실패함.

1906년 '한국평론'을 통하여 일본의 야욕과 야만성을 알림.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로 파견됨.  

1919년 서재필(徐載弼)이 주관하는 잡지에 3·1운동 지지 글을 발표.

1949년 국빈으로 초대되어 한국으로 돌아왔다가 병으로 돌아가심.

1999년 8월 5일, 이승만 대통령이 쓰기로 예정했으나, 묘비명에서 빠져 버린 "헐버트 박사의 묘"라는 글자가

           김대중 대통령의 휘호를 받아 새겨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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