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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https://blog.naver.com/allwin0709/222710567213

 

단군 왕조 47대 정리 

 

단군 이름 기간 이력 참고
1 왕검(王儉) 재위93년
즉위BC2333
단웅(檀雄)을 아버지로 웅씨 왕녀를 어머니로 하여 BC 2370년에 태어나 14세에 비왕(裨王)이 되었다가, BC 2333년에 나라를 세워 아사달(阿斯達)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조선(朝鮮)이라 하였다. 마리산에 제천단(祭天壇)인 참성단을 쌓고 태자 부루에 명하여 도산회의를 통해 우순(虞蕣)에게 오행치수법(五行治水法)을 전하였다. 도랑을 파고 밭길을 내고 누에를 치도록 하고 고기잡이를 가르쳤다. 나라를 삼한(三韓)으로 나누니, 삼한은 오가 64족을 포함하였다. 웅백다(熊佰多)를 마한(馬韓)에 봉하여 달지국(撻支國)에 도읍하니 곧 백아강 (白牙岡)이었다. 마한산에서 천제를 지냈다. 단군왕검이 운사(雲師) 배달신 (倍達臣)에 명하여 강남의 장정 8,000을 선발하여 혈구(穴口)에 삼랑성(三郞城)을 쌓고 마리산에 천제단을 만들었다. (태백일사)  
2 부루(扶婁) 재위58년
즉위BC2240
순나라 임금이 유주와 영주지역에 들어와 국경분쟁을 일으켰다. 단군은 순나라를 정벌하고, 순임금에게 잘못된 처사를 꾸짖었다. 단군은 지금까지도 동양 최고의 효자로 추앙받고 있는 대련과 소련에게 높은 벼슬을 내리고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를 물어 자문을 구했다. 후일 춘추 전국 시대에 공자(孔子)는 대련과 소련의 효에 감동받고, 이를 표본으로 충효의 도를 펼쳤다. 단군은 치수에 뛰어났으며 경제 척도인 도량형(度量衡)을 통일시키고 논밭의 구역을 정리하여, 밭문서를 만들도록 했다. 오늘날 부싯돌, 부루(扶婁)단지는 부루 단군을 뜻한다. (태백일사)  
3 가륵(嘉勒) 재위45년
즉위BC2182
단군은 정음(正音) 38자를 만드니 이것이 가림토(伽臨土) 문자이다. 오늘날 한글의 원형이기도 하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단군은 황하 북쪽지역을 다스리던 색정이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자 고비사막 일대의 약수로 유배를 보낸다. 색정이 반성하고 참회하니, 단군은 그를 용서하고, 약수를 다스리도록 했다. 후일 그는 흉노족(匈奴族)의 조상이 되었다. 강거라는 자가 반란을 일으키자 지백특(티벳)지역을 정벌하고 진압했다. 두지주의 예읍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단군은 반란을 진압하고 그 우두머리인 소시모리를 벌했다. 소시모리의 후손인 협야노는 삼도(三島,일본열도)로 도망쳐서 스스로 천왕(天王)이라 칭했다.(태백일사)  
4 오사구(烏斯丘) 재위38년
즉위BC2137
동생 오사달(烏斯達)을 몽골 임금으로 삼아, 그 지역 백성에게 하늘 이치와 인간의 도리를 가르쳐 문명을 일으키도록 했다. 오사달(烏斯達)은 몽고인 조상이 되었다. 단군은 북쪽을 순시하다가 삼신(三神)에게 제사를 드리고 신령스러운 식물 한 포기를 얻는데, 이것이 산삼이다. 원공패전이라는 화폐를 주조하고, 조선소(造船所)를 만들고, 건창궁과 평양성을 축조하였다. 하나라는 단군조선에 특산물을 바치고 천부의 법이 담긴 신서(神書)를 구해갔다. 그러나 하나라의 왕이 천부의 법에 어긋난 행위를 일삼고, 악덕한 왕 노릇을 하니 하나라를 정벌하였다. (태백일사)  
5 구을(丘乙) 재위16년
즉위BC2099
단군은 셋 아우를 번왕(단군이 세운 봉건 제후)에 봉했다. 장당경(티벳지역)에도 천부의 법을 전하여, 그 지역에도 태백산과 같이 단을 쌓고, 한화를 많이 심도록 했다. 7월 단제께서 남쪽을 순시하사 풍류강(風流江)을 건너 송양(松壤)에 이르러 병을 얻어 붕어하시니 대박산(大博山)에 장사지냈다. 우가(牛加)인 달문(達門)이 뭇 사람으로부터 뽑혀 대통을 계승하였다. 메뚜기 일종인 황충(蝗虫)이 크게 번져 밭과 들을 덮어 백성이 어려움에 처하자 제를 올려 삼신께 고하니 황충이 사라졌다. 육십갑자를 사용하여 책력(달력)을 편찬해 백성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태백일사)  
6 달문(達門) 재위36년
즉위BC2083
단군이 열국 제후들을 불러 장춘에게 천제를 지낸 후 신지(神誌) 발리에게 '사효사' 시를 낭독하게 했다. 내용은 한인, 한웅, 단군에 이은 왕업을 기리는 것이었다. 단군조선에 조공을 바친 곳으로 큰 나라가 2, 작은 나라가 20, 부락이 3624 곳이었다. 이 지역 제후들은 단군과 함께 구월산에서 삼신제(三神祭)를 올렸다. 백성에게 오훈오사를 내려 민생을 안정시켰고 사형제도를 폐지했다. 만장일치로 일을 처리하는 화백회의(和白會議)를 실천하여 홍익(弘益) 민주주의 기초를 다졌다(태백일사).  
7 한율(翰栗) 재위54년
즉위BC2047
임술년(壬戌年)은 한율(翰栗) 임금 원년이다. 아질이 난을 일으켜 백성을 해쳤다. 임금이 이르기를 “오로지 죄를 지은 자는 죄를 범한 데로 돌아가고 도(道)를 닦은 자는 이룬다.” 하며 더욱 덕으로 다스렸다. 여로(黎老)에게 아질(阿叱)을 치게 한 지 3년 만에 그를 사로잡았다. 당시 하나라 정치는 제법 활기차 있었다. 이에 임금은 남후(藍侯)에게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도록 하여 오랫동안 평화가 유지되었다. 한율(翰栗) 임금이 세상을 뜨고 아들 우서한(于西翰) 임금이 되었다(규원사화). 
신선도(神仙道) 정신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술적인 면만을 중시하는 '윤파로'가 단군 앞에서 신선도 우수성에 대해 장황하게 성명하니, 단군은 이를 크게 꾸짖었다(태백일사).
 
8 우서한(于西翰) 재위8년
즉위BC1993
백성 세금부담을 줄이기 위해 수익 20분 1를 거두고 관제를 새로 고쳤다. 천부인(天符印)과 길조를 상징하는 삼족오(三足烏)가 궁전에 날아들자 사람들은 단군 우서한(于西翰)의 큰 성덕을 기렸다(태백일사).
기유 2년(BC1992) 이 해는 풍년이 들어 벼 한 포기에 여덟 개 이삭이 맺혔다. 신해 4년(BC 1990) 단제께서 옷을 바꿔 입으시고 몰래 국경을 나서서 하나라 정세를 살피시고 돌아와 크게 관제를 고쳤다. 을묘 8년(BC 1986)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아술(阿述)이 즉위했다(단군세기).
 
9 아술(阿述) 재위35년
즉위BC1985
청해(靑海) 우착(于捉)이 단군조선을 침공했다. 단군은 백성들과 함께 상춘지역으로 피하고, 구월산 남쪽 기슭에 새 궁궐을 지었다. 3년 후 군대를 정비하여 우착(于捉)을 토벌하여 도읍을 되찾았다(태백일사).
병진 원년(BC1985) 단제께서 어진 덕이 있으시사 백성이 금지하는 바를 위반하는 자가 있어도 반드시 말씀하시기를「똥 눈 땅이 비록 더럽다고 해도 비나 이슬이 내릴 때도 있는 법이다」하시며 죄지은 자를 그냥 놔두시고는 벌하지 않으셨으니, 죄를 지었던 사람도 그 덕에 감화(感化)되어 버렸다. 이에 잘 조화된 교화가 크게 떨쳐졌다. 이날 두 태양이 나란히 나오니 이를 보는 자 마치 넓은 울타리 같았다(단군세기).
 
10 노을(魯乙) 재위59년
즉위BC1950
처음으로 가축을 키우는 우리를 만들어 여러 짐승을 길렀다. 세계 최초로 천문대(天文臺)를 설치하였다(태백일사).
을미 5년(BC1946) 궁문 밖에 신원목(伸寃木)을 설치하고 백성의 억울한 사연을 들으시니 멀리 사는 이까지 기뻐했다. 병오 16년(BC1935) 동문 밖 십 리 육지에서 연꽃이 피어나더니 질 줄 모르고, 누워 있던 돌이 절로 일어섰다. 천하(天河)에서 거북이(神龜)가 그림을 지고 나타났는데 바로 윷판과 같은 것이었다. 발해 연안에서 금덩이가 나왔는데 수량이 13섬이었다. 을축 35년 처음으로 감성(監星)을 설치하였다. 기축 59년 임금이 세상을 뜨자 태자 도해(道奚)가 임금이 되었다(단군세기).
 
11 도해(道奚) 재위57년
즉위BC1891
나라 기강을 바로 잡기 위해 신선도를 중흥시켰다. 12개 명산을 골라 국선소도(國仙蘇塗)를 설치하고 신단수(神檀樹)를 심었다. 가장 큰 나무에 한웅의 상을 모셔 제를 올리고 웅상(雄常)이라 하였다. 전 세계에서 생산되는 물건을 모아 만물박람회를 열었다. 선사 20명을 하나라에 파견하여 천부 가르침을 전했다. 송화강변에 선박을 관리하는 관청을 세워 해상무역을 왕성하게 했다(태백일사). 
을해 46년(BC1846) 3월 삼신을 산 남쪽에서 제사 지내고 이 자리가 끝나자 마침내 누각에 오르셔서 천부경(天符經)에 대해 논하고, 삼일신고(三一神告)를 강론하고 오가(五加)를 돌아보고 말씀하셨다. "이제부터 살생을 금하고 방생하여 옥문을 열고, 떠도는 사람에게 밥을 주어 살 수 있도록 하며 사형제도를 없애노라."(단군세기)
 
12 아한(阿漢) 재위 52년
즉위BC1834
무자 2년(BC1833) 여름 4월 외뿔 가진 짐승이 송화강 북쪽에 나타났다. 가을 8월 단제께서 나라를 두루 순시하였는데 요하(遼河) 남쪽에 이르자 순수관경(巡狩管境) 비(碑)를 세워 역대 제왕 이름을 새겨 이를 전하게 하셨다. 이것이야말로 금석문의 가장 오래된 것이라, 뒤에 창해역사(蒼海力士) 여홍성(黎洪星)은 이 비석을 지나며 시 한 수를 읊었으니 다음과 같다.
마을 밖 변한(弁韓)이라 이르는 곳에 홀로 뛰어난 돌 하나 있었네,
받침은 깨지고 철쭉만 붉었는데 글자는 보이지 않고 이끼만 푸르구나,
다듬어져 처음 생겼을 때 그대로 흥망의 황혼에 우뚝 서있으니
글에 보이는 증거는 하나도 없지만 이 어찌 단군 자취가 아니겠는가(단군세기).
 
13 흘달(屹達), 대음달 재위61년
즉위BC1782
은나라가 하나라를 침입하자 하나라 걸왕(桀王)이 조선에 도움을 청했다.단군은 말량(末良) 장수를 시켜 하나라를 돕게 하였다. 그러나 하나라가 조선과 약조를 깨뜨리니 단군은 하나라를 정벌하여 지금 섬서성 서안 일대를 점거하고 여기에 관청을 설치했다. 소도를 설치하여 주변에 천지화(天指花,무궁화)를 심고, 이곳에서 젊은 인재에게 신선도를 교육하고, 글과 활 등을 익히게 했다. 이들을 국자랑(國子朗), 천지화랑(天指花郞)이라 했다. 이 인재양성 전통은 신라시대까지 이어졌다(태백일사).
무진 50년(BC1733) 오성이 모여들고(五星聚婁) 누런 학이 날아와 뜰의 소나무에 깃들었다(단군세기).
 
14 고불(古弗) 재위 60년
즉위BC1721
을유 6년(BC1716) 큰 가뭄이 있었다. 단제께서 몸소 하늘에 기도하여 비오기를 빌며 말씀하시길,「하늘이 크다 하나 백성이 없으면 무엇에게 베풀 것이며 비는 기름지다 하나 곡식이 없으면 어찌 귀하리오. 백성이 하늘처럼 여기는 것은 곡식이며 하늘이 마음처럼 여기는 것은 사람이니 하늘과 사람은 일체일진대 하늘은 어찌하여 백성을 버리시는가? 이제 비는 곡식을 기름지게 할지며 때 맞춰 구제하게 하소서」라고 하니, 말을 끝내자 큰비가 수 천리에 삼대처럼 내렸다. 신유 42년(BC1680) 9월 말라죽었던 나무에 새싹이 나고 오색의 큰 닭이 성 동쪽, 자촌(子村) 집에서 태어나니 이를 본 사람들이 알아보고는 봉황(鳳凰)이라 하였다. 관리를 사방에 보내 호구를 조사 계산하니 총계 1억 8천 만구였다(단군세기).  
15 대음(代音), 후흘달 재위 51년
즉위BC1661
경진 원년(BC1661) 은(殷)나라 왕 소갑(小甲)이 사신을 보내 화친을 구했다. 이 해에 80분 1 세법을 정하였다. 신사 2년(BC.1660) 홍수가 크게 일어나 민가가 큰 피해를 입었다. 이에 단제께서는 매우 불쌍하게 여기셔서 곡식을 창해사수(蒼海蛇水) 땅으로 옮겨 백성들에게 고루 나누어 주었다. 겨울 10월 양운국(養雲國)과 수밀이국(須密爾國)의 사신이 와서 특산물을 바쳤다. 기축 10년(BC1652) 단제께서 가을 7월 우루국(虞婁國) 사람 20인이 투항해 오니 염수(鹽水) 근처 땅에 정착하도록 명하였다. 정미 28년(BC1634) 단제께서 태백산에 오르사 비석을 세워 역대 단군 이름과 역대 왕의 공적을 새겼다(단군세기).  
16 위나(尉那) 재위 58년
즉위BC1610
무술 28년(BC1583) 구한의 여러 한(汗)이 영고탑(寧古塔)에 모여 삼신(三神), 상제에게 제사지냈으니 한인, 한웅, 치우 및 단군왕검을 모시었다. 닷새 동안 크게 백성과 더불어 연회를 베풀고 불을 밝혀 밤을 지새며 경을 외우고 마당 밟기를 하였다. 한쪽은 횃불을 나란히 하고 또 한쪽은 둥글게 모여 서서 춤을 추며 애한(愛桓)의 노래를 함께 불렀다. 애한이란 곧 옛날 신에게 올리는 노래이다. 선인들은 한화(桓花)에 이름을 붙이지 않고 다만 꽃이라고만 하였다. 애한 노래는 다음과 같다.
산에는 꽃이 있네. 산에는 꽃이 피네.
지난 해 만 그루 심고 올해 또 만 그루 심었지.
불함산에 봄이 오면 온 산엔 붉은 빛
천신을 섬기고 태평을 즐긴다네. (단군세기)
 
17 여을(余乙) 재위 68년 
즉위BC1552
갑신 52년(BC1501) 단제께서 오가와 함께 나라를 돌아보셨는데, 개사성(蓋斯城) 근처에 이르니 푸른 도포를 입은 노인이 있어 하례를 드려 말했다. 「오래 선인(仙人)의 나라에 살며 선인의 백성이 되어 살고 있지만 단제의 덕은 두루 미쳐 그르침이 없고 왕의 다스림은 편벽되지 않고 백성은 이웃에서 수심, 고통, 책화(責禍)를 구경하지 못하고, 믿음으로써 경계를 관리하니 성이나 나라에서 싸움을 볼 수 없습니다.」
임진 2년(BC1949) 몸소 마을로 행차하셔서 안부를 물으셨는데, 어가(御駕)가 야외에 머무르니 현자들이 많이 주위에 몰려들었다. 이에 단제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고마워라, 고마워라, 짐이 덕을 닦은 지 오래지 못해 백성의 바람에 보답하지 못할까 두렵게 여기노라.」 (단군세기)
 
18 동엄(冬奄) 재위 49년
즉위BC1484
갑신년은 동엄(冬俺) 임금 원년이다. 속진후가 커다란 짐승을 바쳤는데 그 크기가 집만 했다. 그때 제후들이 서로 침공하는 일이 있었다. 우수주(牛首州)에 다시 앙골(盎骨)이란 자가 있었는데 아우 장골과 함께 난을 일으켜 서쪽 변두리 백성이 심한 피해를 입었다. 부여후가 평정할 수 없어서 웅가인 충달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서쪽을 치게 했다. 예후와 속진후가 또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도와주었기에 사나운 앙골을 5년 만에 평정했다(규원사화). 
정축 원년(BC1484), 병신 20년(BC1465) 지백특(支伯特) 사람이 와서 특산물을 바쳤다. 을축 49년(BC1436)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구모소(丘牟蘇)가 즉위하였다(단군세기).
 
19 구모소(緱牟蘇) 재위 55년
즉위BC1435
남상 사람에게 벼슬자리를 주었다. 아우 종성을 청아왕으로 삼았다. 공창을 세워 닥나무 껍질로 종이를 만들고, 껍질로 베를 짜서 옷감을 생산했다. 신하 지리숙이 별의 궤도를 관측하여 주천력(周天曆)을, 팔괘가 중첩되었을 때 병화를 해설한 팔괘상주론(八卦相重論)을 편찬했다(태백일사).
갑진년은 구모소(緱牟蘇) 임금 원년이다. 남쪽으로 순행하다 나랑홀에 이르러 성을 다시 고치고 10월에 청구 백성이 모여 하늘에 제사하고 흩어져 사냥했다. 단군 구모소(緱牟蘇)가 세상을 뜨고 아들 고홀(固忽)이 임금이 되었다(규원사화).
 
20 고홀(固忽) 재위 43년
즉위BC1380
북흉노가 변방에서 어른 노릇을 하려 들자 군대를 물리쳤다. 단군이 서남쪽으로 행차하여 은나라 수도에서 머물다가 다음 달에 돌아왔다. 영고탑을 개축하고 별궁을 지었다. 공공(共工) 공홀(工忽)이 단군조선 전 지역의 지도를 제작하였다(태백일사). 
기사년은 고홀(固忽) 임금 원년이다. 속진후가 담비가죽으로 만든 가죽옷을 바쳤다. 이것을 잘 보관해 두고 공덕이 있는 사람에게 주려고 기다렸다. 세상이 아직 평화롭지 못한데 단군 고홀(固忽)이 세상을 뜨니 아들 소태(蘇台)가 임금이 되었다(규원사화).
 
21 소태(蘇台) 재위 52년
즉위BC1337
은나라 왕 소을(小乙)이 공물을 바쳤다. 은나라 왕이 귀방(鬼方)을 점령하고 주변 다른 나라를 침공하였다. 그러나 조선에게 대패하여 단군에게 화해를 청하며 조공을 바쳤다. 길림성과 내몽고 지역인 개사원(蓋斯原) 욕살(성주 또는 장군) 고등(高登)이 서북지역을 공략하여 세력을 키워나갔다(태백일사). 
52년(을미)에 우현왕 고등이 죽고 손자 색불루(索弗婁)가 우현왕이 되었다. 임금이 나라 안을 두루 살피다가 남쪽 해성에 이르러 그곳 할아버지들과 함께 하늘에 제사 지내고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이어 곧 오가를 불러 이들과 임금 자리를 물려주는 일을 의논하고 늙어서 부지런히 일 할 수 없다고 하며 나라 다스리는 일을 서우여(徐于餘)에게 맡기려 하였다. 후에 아사달에 숨어 살다가 세상을 떴다(단군세기).
 
22 색불루(索弗婁) 재위 48년
즉위BC1285
단군 제위에 오른 색불루는 삼한(三韓)을 삼조선으로 고쳤다. 은나라와 몇 차례 싸워 이기고 은나라 수도를 격파한다. 백성 일부를 회대(산동성, 하남성, 강소성, 안휘태 일대) 땅으로 이주시켜 가축을 기르고 농사를 짓게 하니 나라 위세가 천하에 크게 떨쳤다. 남국, 고죽군 등 주변 여러 적을 쫓아내고 백성을 남쪽으로 이주시켜 엄독홀(俺瀆忽)까지 땅을 넓혔다. 단군은 여파달(黎巴達)에게 군사를 주어 빈과 기의 땅을 차지하게 하고 그곳 유민들과 더불어 여나라를 세우게 했다. 그 후 여나라는 서융과 함께 은나라 제후들 사이에 섞여 사니 남국 위세가 강성해져 단군 교화가 멀리까지 미쳤다(태백일사).  
23 아홀(阿忽) 재위 76년
즉위BC1237
숙부 고불가(固弗加)에게 낙랑홀(지금 북경지방)을 통치하게 하였다. 돌궐에서 사절이 오니 후하게 대접해서 보냈다. 남국 왕 '금달'이 청구 왕과 구려 왕을 산동성 주개에서 만나, 다시 몽고 군사와 합세하여 은나라 성책을 쳐부수고 오지까지 깊숙이 쳐들어가 회대 땅을 평정하였다. 산동성 태산 곡부지역 통치자로 포고씨를, 서주지역 통치자로 영고씨를, 화수지역 통치자로 방고씨를 임명했다(태백일사). 
무자 5년(BC1233) 이한(二韓) 및 오가(五加)를 불러서 영고탑으로 도읍을 옮길 것을 의논하는 것을 중지하도록 하였다. 기해 76년(BC1162)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연나(延那)가 즉위하였다(단군세기).
 
24 연나(延那) 재위 11년
즉위BC1161
여러 제후가 단군 명을 받들어 소도(蘇塗)를 증설하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큰일이나 재앙이 있을 때는 소도에서 기도하여 백성 뜻을 하나로 모았다(태백일사).
기축년에 숙부인 고불가(固弗加)가 섭정했다. 이듬해 상나라 사람이 공격해 와서 남쪽 국경에까지 이르렀다. 남후가 여러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전쟁에서 이긴 후 서로 화해했다. 나라 안에 단소(壇所)를 만들고 제후들이 명을 받들어 하늘에 빌었다. 나라에 큰 일이 생기고 비바람 등 재앙이 일어나면 주신에게 빌어 모든 신령들에 골고루 미치게 했다. 속진 땅에 큰 뱀이 나타났다. 몸은 푸르고 머리는 누르며 큰 사슴을 쉽게 삼키는 것을 보고 백성들이 쏠려서 숭배했다. 이에 거굴지(巨屈支)를 시켜 끌어다 죽이게 했다(규원사화).
 
25 솔나(率那) 재위 88년
즉위BC1150
동교에 천단(天壇)을 쌓고 삼신(三神)에게 제사지내고 노래하고 북을 치고 환무를 추었다. 은나라가 망한 뒤 그 신하였던 서여가 태행산 서북 지역으로 피하여 사니 이를 듣고 그 지방을 순시하며 그를 살폈다. 7년 후 서여는 서화 지역으로 옮겨가니 인사 왕래조차 거절했다(태백일사). 
임인년은 솔나(率那) 임금 원년이다. 북방 변두리를 순행하다가 가난한 백성들이 어렵게 사는 것을 보고 탄식하며 "달팽이도 집이 있고 벌도 먹을 것이 있는데 어찌 우리 백성은 집도 없이 떠돌아 다니는가?" 하고 넓은 곳으로 옮겨 살도록 했다. 이리하여 남북 백성 사이에 배와 수레가 서로 왕래하게 되었다(규원사화).
 
26 추로(鄒魯) 재위 65년
즉위BC1062
재위 15년 오성원이 간언하길 "오랫동안 평안한 백성은 교만하고 방자하여 가르쳐도 감화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난을 겪은 백성은 고생을 함께 걱정해주면 감화되기 쉬우니, 비유하면 굶주린 자에게는 음식이 달고 배부른 자에게는 맛있는 음식이 없습니다. 오늘에 이르러 나라가 태평(太平)한 지 이미 오래되어 백성들이 교만하고 방자하여 가르치기가 매우 어려우니, 폐하께서는 민정을 잘 살피시어 교만하고 방자한 관습을 없애기 바랍니다." 하니 임금께서 그 말을 따르셨다. 20년, 기자조선(箕子朝鮮) 사절이 입조하였고, 28년 달단 추장이 입조(入朝)하였다. 39년, 의학원을 세웠다(단기고사).  
27 두밀(豆密) 재위 26년
즉위BC997
천해(天海,바이칼호) 물이 넘쳐 사아란산이 무너졌다. 같은 해 수밀이국(須密爾國), 양운국(養云國), 구다천국(句茶川國)이 사신을 보내어 특산물을 바쳤다. 큰 가뭄 끝에 큰 비가 쏟아져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생활이 힘들게 되자, 단군은 창고에 비축했던 곡식을 풀어 백성들을 구제하였다(태백일사). 
정묘년은 두밀(豆密) 임금 원년이다. 사람을 시켜 환검 이후 모든 임금 말씀을 적어 궁 안에 걸고 출입하는 사람에게 보도록 했다. 군사로 상나라를 칠 때 속진후 다홀(多忽)이 군사를 보내 동해로 들게 하여 귀주를 쳐서 그 땅을 평정했다(규원사화).
 
28 해모(奚牟) 재위 28년
즉위BC971
경술 원년(BC971) 단제 앓으시니 백의동자(白衣童子)로 하여금 하늘에 기도하도록 하니 곧 병이 나으셨다. 경신 11년(BC961) 여름 4월, 태풍이 크게 일어 폭우가 쏟아지니 땅위에 물고기가 쏟아져 내렸다. 정묘 18년(BC954) 빙해(氷海)의 뭇 한(汗)들이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단군세기).
임자년은 해모 임금 원년이다. 남후와 비류후와 청구후를 시켜 소니수에 함께 모이게 했는데 임금이 병을 얻었다. 이에 사람들에게 흰 옷을 입고 하늘에 빌도록 했더니 마침내 완쾌됐다. 졸본후가 영초(靈草)를 바쳤는데 모든 병을 쉽게 고칠 수 있었다(규원사화).
 
29 마휴(摩休) 재위 34년
즉위BC943
주나라 사람이 공물을 바쳤다. 지진이 일어나고, 남해에서 조수가 석자(三尺)나 물러났다. 왕문이 이두법(吏讀法)을 지어 바치니 삼한에 명하여 시행토록 하였다(태백일사).
갑술년은 마휴(摩休) 임금 원년이다. 상나라 사람이 입조했다. 남이(南夷) 바다 가운데서 진흙산이 솟았는데 물 속에서 불이 나와 진흙과 합하여 돌이 되었다고 청구후가 보고했다. 마휴(摩休) 임금이 세상을 뜨니 아우 내휴(奈休)가 임금이 되었다(규원사화).
 
30 내휴(奈休) 재위 35년
즉위BC909
임자원년(BC909) 청구 다스림을 둘러보시고 돌에 치우천왕 공덕을 새겼다. 서쪽으로 엄독홀(奄瀆忽)에 이르러 제후국 여러 한(汗)과 만난 후 병사를 사열하고는 하늘에 제사지내고 주(周)나라 사람과 수교를 맺었다. 병진 5년(BC905) 흉노가 공물을 바쳤다. 계미년은 내휴 임금 원년이다. 구려후(句麗侯) 우타(于它)가 들어와 용가가 되었다(단군세기).
임금이 남쪽으로 순행하며 청구 정치를 돌아보고 아사달에 이르렀다. 거기에서 다시 서쪽을 순행하여 엄려홀(奄慮忽)에 이르러 제후들과 큰 모임을 갖고 돌아왔다. 은나라 사람과 화해했다(규원사화).
 
31 등올(登屼) 재위 25년
즉위BC874
왕문이 녹도문이 번거롭다 하여 새로운 글 '부예(한자의 원형)'를 만들어 바쳤는데, 단군은 이를 백성에게 사용하도록 했다. 봉황이 백악(白岳)에서 울고, 기린이 상림원에서 노닐었다(태백일사).
병자년은 등올(登屼) 임금 원년이다. 등올(登屼) 임금이 세상을 뜨고 아들 추밀(鄒密)이 임금이 되었다(규원사화).
 
32 추밀(鄒密) 재위 30년
즉위BC849
임자 원년(BC849) 갑인 3년(BC847), 선비산(鮮卑山) 추장 문고(們古)가 공물을 바쳤다. 계해 12년(BC838) 초나라 대부 이문기(李文起)가 조정에 들어와 벼슬을 했다. 갑자 13년(BC837) 3월에 일식이 있었다. 병인 15년(BC835) 농사가 크게 흉작이었다(단군세기).
임오년은 추밀(鄒密) 임금 원년이다. 예후인 지막루(知莫婁)가 들어와 용가가 되었다. 임금이 궁궐을 떠나 우수홀(牛首忽)에 이르러 제후를 모이게 했다. 드디어 그곳에서 세상을 떴다(규원사화).
 
33 감물(甘勿) 재위 24년
즉위BC819
무자 7년(BC813) 영고탑 서문 밖에 삼성사(三聖祠)를 세우고 친히 제사를 올리셨다. 맹세하여 올린 글이 있으니,「삼성의 존귀함은 신(神)과 더불어 그 공이 나란하며 삼신의 덕은 성인으로 인하여 크게 유익하나니, 빈 것과 찬 것은 한 몸이요(虛粗同體), 낱개와 전체는 오직 하나일 뿐(個全一如), 지혜와 삶을 함께 닦고(智生雙修), 모습과 얼을 함께 넓히나니(形魂俱衍), 이에 따라 참다운 가르침이 서고 믿음이 오래감은 자명한 이치라. 그 기세를 귀하게 여기고 스스로 살피고 되돌아본다면 저 백악(白岳)은 어딜 가나 끝없이 푸르리니 여러 성인은 끝없이 이어나고 글은 흥하고 예와 악은 이로써 크리니, 도술은 그 연원이 넓어서 하나를 잡으면 셋을 포함하고(執一含三) 셋을 합쳐서 하나로 돌아오네(會三歸一). 크게 하늘 가르침을 펴시고 영세토록 법으로 삼으리라.」라고 하였다(단군세기).  
34 오루문(奧婁門) 재위 23년
즉위BC 795
병오 원년(BC795)에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 백성 모두 기뻐하며 도리가(兜里歌)를 지어 부르니 그 가사는 다음과 같다. 
하늘엔 아침 해 맑은 빛내려 비추고
나라엔 어진 이 큰 가르침 널리 내려와
큰 배달나라 사람마다 마음 편하고
밝고 밝은 노래 속에 끝없이 태평하라.
을묘 10년(BC786) 두 해가 나란히 뜨더니 마침내 누런 안개가 사방에 그득했다. 무진 23년(BC773)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사벌(沙伐)이 즉위했다(단군세기).
 
35 사벌(沙伐) 재위 68년
즉위BC 772
기사 원년(BC772) 갑술 6년(BC767) 이 해에 황충(蝗蟲) 피해와 홍수가 있었다. 임오 14년(BC759) 범이 궁전에 들어왔다. 임진 24년(BC748) 큰 비가 내리니 산이 무너져서 골짜기를 메웠다. 무오 50년(BC723), 단제께서 장군 언파불합(彦波弗哈)을 보내 해상(海上)의 웅습(熊襲)을 평정하였다. 갑술 66년(BC707) 단제께서 조을(租乙)을 파견하여 똑바로 연(燕)나라 도읍을 돌파하고 제(齊)나라 군사와 임치(臨淄) 남쪽 교외에서 싸워 승리하였음을 알려왔다. 병자 68년(BC705) 단제 붕어하시니 태자 매륵(買勒)이 즉위했다(단군세기).  
36 매륵(買勒) 재위 58년
즉위 BC 704
정축 원년(BC704) 갑진 28년(BC677) 지진과 해일이 있었다. 무진 32년(BC673) 서촌(西村) 한 백성의 집에서 소가 다리 여덟 개 달린 송아지를 낳았다. 신해 35년(BC670) 용마(龍馬)가 천하(天河)에서 나왔는데 등에는 별무늬가 있었다. 갑인 38년(BC667) 협야후(陜野侯) 배반명(裴幋命)을 보내어 바다의 도적을 토벌케 하였다. 12월엔 삼도(三島)가 모두 평정되었다. 무진 52년(BC653) 단제께서 병력을 보내 수유(須臾)의 군대와 함께 연나라를 정벌하게 하였다. 이에 연나라가 제나라에 위급함을 알리자 제나라가 대거 일어나 고죽(孤竹)에 쳐들어 왔으나, 우리 복병으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화해를 구걸하고 물러갔다(단군세기).  
37 마물(麻勿) 재위 56년
즉위 BC 646
태자 이름을 옛 땅을 되찾자는 뜻으로 ‘다물(多勿)’이라 했다. 토목사업을 크게 일으켜 궁궐을 중건했다. 쇠를 부어 화폐 ‘방공전’을 만들어 화폐개혁을 이루었다. 도인 황학노가 신술이나 초능력을 발휘하는 등 신선도의 본래 정신을 망각하고, 백성들에게 혼란을 주는 일이 일어났다(태백일사).
무자년은 마물(麻勿) 임금 원년이다. 진번후(眞番侯) 추돌(鄒柮)이 들어와 용가가 되었다. 남쪽으로 순행하여 당장경(唐莊京)에 이르러 아사달에서 세상을 떴다. 진번후가 임금이 되었는데 임금의 동생 다물이다(규원사화).
 
38 다물(多勿) 재위 45년
즉위BC 590
신하 표상술 건의에 따라 나라의 기강을 바로 잡고자 국정을 쇄신했다. 병신년은 다물 임금 원년이다. 알유가 다시 서쪽 변두리를 침입했기에 진번후(眞番侯)는 예후(濊侯)와 함께 이를 물리치고 국경까지 진격했다가 돌아왔다. 다물(多勿) 임금이 세상을 뜨고 아들 두홀(豆忽)임금이 되었다(규원사화).  
39 두홀(豆忽) 재위 36년
즉위BC 545
큰 가뭄이 들었다. 노자의 아버지는 한건이고 그의 선조는 풍 사람이었다. 후에 함곡관, 내몽고를 걸쳐 아유타에 이르러 백성을 교화했다(태백일사).
을묘년은 두홀(豆忽) 임금 원년이다. 비류후가 큰 거북이를 바쳤다. 그 길이는 한 길이 넘었다. 속진후가 용가가 되었다. 흘달 임금 때 처음으로 우리나라 사람이 빈기(邠岐)로 상당히 많이 들어가 살았으나 상나라 탕왕(湯王)이 일어나면서 다시 물러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농사를 짓고 누에치는 빈민이 오히려 그 땅에 흩어져서 풍속을 잃지 않고 살았다. 여홀(黎忽)은 드디어 은나라 제후 및 서융(西戎)과 섞여 살게 되었다. 남씨(藍氏) 위세가 점점 커지니 임금 명령이 항산 남쪽 땅까지 미쳤다(규원사화).
 
40 달음(達音) 재위 18년
즉위 BC 509
진나라 사절이 왔다. 윤복지가 (도덕경)을 저술하여 단군께 바쳤다. 건융이 조선에 복종하겠다고 다짐했다(태백일사).
청구후 딸 아시씨(啊施氏)를 황후로 맞이했는데 어질고 덕이 있어 백성이 그를 사모했다. 개마후가 영초(靈草)를 바쳤다. 옛날에 부여 사람이 알유 땅에 가서 산 일이 있었다. 그들이 그곳 사람들과 섞여 살면서 풍속은 익혔으나 오래도록 계속할 만한 생업이 없었다. 이에 수렵으로 생활을 하며 짐승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다보니 이들을 맥(貊)이라 했다. 그러다가 이들은 차츰 엄려(奄廬) 북서쪽 땅에 옮겨 살게 됨에 따라 결국은 남씨(藍氏) 백성이 되었다(규원사화).
 
41 음차(音次) 재위 20년
즉위 BC 491
재위 4년, 공상이 종교론을 저술하였다. 연나라 사신이 인사를 왔다. 한나라 사절이 입조했다. 정유년은 음차(音次) 임금 원년이다. 왕실이 쇠약해지고 제후가 점차 강해졌다. 그러나 음차(音次)가 즉위하자 어진 덕이 있어 백성이 사모하니 다시 왕도(王道)가 일어나고 제후도 서로 와서 임금께 예를 올렸다. 음차(音次) 임금이 세상을 뜨니 아들 을우지(乙于支)가 임금이 되었다(규원사화).  
42 을우지(乙于支) 재위 10년
즉위BC 471
재위 5년, 백호돈이 지리학, 광물학을 저술하였다(단기고사).
정나라 사절이 인사를 왔다. 이일선이 천리경을 저술하여 단군께 바쳤다. 병진년은 을우지(乙于支) 임금 원년이다. 을우지(乙于支) 임금이 세상을 뜨고 아들인 물리(勿理)가 임금이 되었다(규원사화). 
 
43 물리(勿理) 재위 36년
즉위BC 461
경진 원년(B.C.461), 을묘 36년(B.C.426), 융안(隆安)의 사냥족(獵戶) 우화충이 장군을 자칭하며, 무리 수 만 명을 모아 서북쪽 36군을 함락시켰다. 단제는 병력을 파견했으나 물리치지 못했으며, 겨울이 되자 도적들은 도성을 에워싸고 급하게 공격했다. 단제께서는 좌우의 궁인과 함께 종묘사직의 신주들을 받들어 모시고는 배를 타고 피난하여 해두(海頭)로 가시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서 돌아가셨다. 그 해에 백민성(白民城)의 욕살(褥薩) 구물(丘勿)이 어명을 받아 병사를 일으켜 먼저 장당경(藏唐京)을 점령하였다. 이에 구지(九地)의 군사들이 그를 따르니 동,서의 압록(鴨綠) 18성이 모두 병력을 보내 원조하여 왔다(단군세기).  
44 구물(丘勿) 재위 29년
즉위BC 425
병진 원년(B.C.425) 3월 큰물이 도성을 휩쓸어 버리니 적병들은 큰 혼란에 빠졌다. 구물 단제께서 1만 군사를 이끌고 가서 이들을 징벌하니 적군은 싸워보지도 못하고 괴멸하니 마침내 우화충을 죽여 버렸다. 이에 구물은 여러 장수에게서 추앙을 받는 바 되어, 마침내 3월 16일에 단을 쌓아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장당경(藏唐京)에서 즉위하였다. 이에 나라 이름은 대부여라 고치고, 삼한(三韓)은 삼조선(三朝鮮)으로 개정하였다. 정사 2년(BC424) 예관(禮官)이 청하여 삼신영고(三神迎鼓) 제사를 지냈다. 첫 번째 절에 세 번 머리 조아리고, 두 번째 절에 여섯 번 머리를 조아리고, 세 번째 절에 아홉 번 머리를 숙여 예를 올리는데, 무리를 거느리고는 특별히 열 번 머리를 조아렸다. 이를 삼육(三六) 대례(大禮)라고 한다(규원사화).  
45 여루(余婁) 재위 55년
즉위BC 396
요녕성 장령현 낭산에 성을 쌓았다. 연나라 사람이 변방 고을을 침범하니 장수 묘장춘(苗長春)이 이를 쳐부수었다. 연나라 배도(倍道)가 침입하여 요서를 함락하고 운장으로 밀고 들어오니, 번조선 대장군 우문언(于文言)이 이를 막자, 진조선(眞朝鮮)과 막조선(莫朝鮮)도 군대를 보내 도왔다. 연나라와 제나라 군사를 오도하(五道河)에서 쳐부수고 요서 성들을 되찾았다. 연나라 사람이 연운도에 주둔하여 배를 만들면서 다시 침입할 준비를 하자 우문언이 이를 쳐부수고 장수들의 목을 베었다. 북막 우두머리 액니거길이 연을 칠 것을 정하니 장수 신불사(申不私)와 함께 연나라 상곡을 공격하고 성읍을 쌓게 하였다. 연나라가 해마다 침범해오다가 사신을 보내 화해를 청하니 단군이 허락하고 조양 서쪽으로 국경을 삼았다(태백일사).  
46 보을(菩乙) 재위 46년
즉위BC 341
경진 원년(BC341) 12월 번조선 왕 해인(解仁)이 연나라가 보낸 자객에게 시해 당하니 오가(五加)가 다투어 일어났다. 정사 38년(BC304) 도성에 큰불이 일어나 모두 타버리니 단제께서는 해성의 이궁으로 피난하였다.  계해 44년(BC298) 북막 추장 이사(尼舍)가 음악을 바치니 이를 받으시고 후하게 상을 내렸다. 을축 46년(BC296) 한개(韓介)가 수유 군대를 이끌고 궁궐을 침범하여 스스로 왕이 되려하니 대장군 고열가(高列加)가 의병을 일으켜 이를 쳐부수었다. 단제께서는 대사령(大赦令)을 내리셨는데 이때부터 나라의 힘이 매우 약해져서 나라 비용도 제대로 쓸 수 없었다. 단제께서 붕어하셨는데 후사가 없어 고열가가 단군 물리(勿里:43세)의 현손으로써 무리의 사랑으로 추대받기도 하였고 또 공도 있었던지라 마침내 즉위하였다(단군세기).  
47 고열가(古列加) 재위 58년
즉위BC 295
단군왕검 사당을 백악산(白岳山)에 세우고 사철제를 모시게 하였다. 북막 우두머리 아리당부(阿里當夫)가 같이 연나라를 치자 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해모수가 웅심산(熊心山)에서 내려와 조선 옛 도읍 백악산을 습격하고 점령한다. 자신을 단군(檀君)이라 자칭하자 사방에서 그를 따를 자가 생겨났다. 이것이 북부여다. 이후 여러 장수가 함부로 난을 일으키는 일이 빈번했다. BC 238년 3월 고열가(古列加) 단군은 천제 후, 오가와 상의하여 공화정치를 펴게 하고, 왕위를 버리고 입산수도하여 신선이 되었다. 단군 고열가(古列加)가 제위를 버리고 아사달에 들어가니, 오가가 나라를 다스렸다. 6년 후 해모수가 세운 북부여에 단군조선은 흡수되었다(태백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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